朱自清的《荷塘月色》和《背影》

发布时间:2024-05-09 07:57 发布:上海旅游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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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影
朱自清
我与父亲不相见已二年余了,我最不能忘记的是他的背影。
那年冬天,祖母死了,父亲的差使也交卸了,正是祸不单行的日子。我从北京到徐州,打算跟着父亲奔丧回家。到徐州见着父亲,看见满院狼藉的东西,又想起祖母,不禁簌簌地流下眼泪。父亲说:“事已如此,不必难过,好在天无绝人之路!”
回家变卖典质,父亲还了亏空;又借钱办了丧事。这些日子,家中光景很是惨淡,一半为了丧事,一半为了父亲赋闲。丧事完毕,父亲要到南京谋事,我也要回北京念书,我们便同行。
到南京时,有朋友约去游逛,勾留了一日;第二日上午便须渡江到浦口,下午上车北去。父亲因为事忙,本已说定不送我,叫旅馆里一个熟识的茶房陪我同去。他再三嘱咐茶房,甚是仔细。但他终于不放心,怕茶房不妥帖;颇踌躇了一会。其实我那年已二十岁,北京已来往过两三次,是没有什么要紧的了。他踌躇了一会,终于决定还是自己送我去。我两三劝他不必去;他只说,“不要紧,他们去不好!”
我们过了江,进了车站。我买票,他忙着照看行李。行李太多了,得向脚夫行些小费才可过去。他便又忙着和他们讲价钱。我那时真是聪明过分,总觉他说话不大漂亮,非自己插嘴不可,但他终于讲定了价钱;就送我上车。他给我拣定了靠车门的一张椅子;我将他给我做的紫毛大衣铺好坐位。他嘱我路上小心,夜里警醒些,不要受凉。又嘱托茶房好好照应我。我心里暗笑他的迂;他们只认得钱,托他们只是白托!而且我这样大年纪的人,难道还不能料理自己么?唉,我现在想想,那时真是太聪明了!
我说道,“爸爸,你走吧。”他望车外看了看说:“我买几个橘子去。你就在此地,不要走动。”我看那边月台的栅栏外有几个卖东西的等着顾客。走到那边月台,须穿过铁道,须跳下去又爬上去。父亲是一个胖子,走过去自然要费事些。我本来要去的,他不肯,只好让他去。我看见他戴着黑布小帽,穿着黑布大马褂,深青布棉袍,蹒跚地走到铁道边,慢慢探身下去,尚不大难。可是他穿过铁道,要爬上那边月台,就不容易了。他用两手攀着上面,两脚再向上缩;他肥胖的身子向左微倾,显出努力的样子。这时我看见他的背影,我的泪很快地流下来了。我赶紧拭干了泪。怕他看见,也怕别人看见。我再向外看时,他已抱了朱红的橘子往回走了。过铁道时,他先将橘子散放在地上,自己慢慢爬下,再抱起橘子走。到这边时,我赶紧去搀他。他和我走到车上,将橘子一股脑儿放在我的皮大衣上。于是扑扑衣上的泥土,心里很轻松似的。过一会说:“我走了,到那边来信!”我望着他走出去。他走了几步,回过头看见我,说:“进去吧,里边没人。”等他的背影混入来来往往的人里,再找不着了,我便进来坐下,我的眼泪又来了。
近几年来,父亲和我都是东奔西走,家中光景是一日不如一日。他少年出外谋生,独力支持,做了许多大事。哪知老境却如此颓唐!他触目伤怀,自然情不能自已。情郁于中,自然要发之于外;家庭琐屑便往往触他之怒。他待我渐渐不同往日。但最近两年的不见,他终于忘却我的不好,只是惦记着我,惦记着我的儿子。我北来后,他写了一信给我,信中说道:“我身体平安,惟膀子疼痛厉害,举箸提笔,诸多不便,大约大去之期不远矣。”我读到此处,在晶莹的泪光中,又看见那肥胖的、青布棉袍黑布马褂的背影。唉!我不知何时再能与他相见!

荷塘月色/朱自清

这几天心里颇不宁静。今晚在院子里坐着乘凉,忽然想起日日走过的荷塘,在这满月的光里
,总该另有一番样子吧。月亮渐渐地升高了,墙外马路上孩子们的欢笑,已经听不见了;妻
在屋里拍着闰儿,迷迷糊糊地哼着眠歌。我悄悄地披了大衫,带上门出去。

沿着荷塘,是一条曲折的小煤屑路。这是一条幽僻的路;白天也少人走,夜晚更加寂寞。荷
塘四面,长着许多树,蓊蓊郁郁的。路的一旁,是些杨柳,和一些不知道名字的树。没有月
光的晚上,这路上阴森森的,有些怕人。今晚却很好,虽然月光也还是淡淡的。

路上只我一个人,背着手踱着。这一片天地好像是我的;我也像超出了平常的自己,到了另
一个世界里。我爱热闹,也爱冷静;爱群居,也爱独处。像今晚上,一个人在这苍茫的月下
,什么都可以想,什么都可以不想,便觉是个自由的人。白天里一定要做的事,一定要说的
话,现在都可不理。这是独处的妙处;我且受用这无边的荷香月色好了。

曲曲折折的荷塘上面,弥望的是田田的叶子。叶子出水很高,像亭亭的舞女的裙。层层的叶
子中间,零星地点缀着些白花,有袅娜地开着,有羞涩的打着朵儿的;正如一粒粒的明珠,
又如碧天里的星星,又如刚出浴的美人。微风过处,送来缕缕清香,仿佛远处高楼上渺茫的
歌声似的。这时候叶子与花也有一些的颤动,像闪电般,霎时传过荷塘的那边去了。叶子本
是肩并肩密密的挨着,这便宛然有了一道凝碧的波痕。叶子底下是脉脉的流水,遮住了,不
能见一些颜色;而叶子却更见风致了。

月光如流水一般,静静地泻在这一片叶子和花上。薄薄的青雾浮起在荷塘里。叶子和花仿佛
在牛乳中洗过一样;又像笼着轻纱的梦。虽然是满月,天上却有一层淡淡的云,所以不能朗
照;但我以为这恰是到了好处--酣眠固不可少,小睡也别有风味的。月光是隔了树照过来
的,高处丛生的灌木,落下参差的斑驳的黑影,却又像是画在荷叶上。塘中的月色并不均匀
,但光与影有着和谐的旋律,如梵婀玲上奏着的名曲。

荷塘的四面,远远近近,高高低低的都是树,而杨柳最多。这些树将一片荷塘重重围住;只
在小路一旁,漏着几段空隙,像是特为月光留下的。树色一例是阴阴的,乍看像一团烟雾;
但杨柳的丰姿,便在烟雾里也辨得出。树梢上隐隐约约的是一带远山,只有些大意罢了。树
缝里也漏着一两点路灯光,没精打彩的,是渴睡人的眼。这时候最热闹的,要数树上的蝉声
与水里的蛙声;但热闹的是它们的,我什么也没有。

忽然想起采莲的事情来了。采莲是江南的旧俗,似乎很早就有,而六朝时为盛,从诗歌里可
以约略知道。采莲的是少年的女子,她们是荡着小船,唱着艳歌去的。采莲人不用说很多,
还有看采莲的人。那是一个热闹的季节,也是一个风流的季节。梁元帝《采莲赋》里说得好
:于是妖童媛女,荡舟心话:[益鸟]首徐回,兼传羽杯;棹将移而藻挂,船欲动而萍开。尔其
纤腰束素,迁延顾步;夏始春余,叶嫩花初,恐沾裳而浅笑,畏倾船而敛裾。

可见当时嬉游的光景了。这真是有趣的事,可惜我们现在早已无福消受了。于是又记起《西
洲曲》里的句子:

采莲南塘秋,莲花过人头;低头弄莲子,莲子清如水。

今晚若有采莲人,这儿的莲花也算得“过人头”了;只不见一些流水的影子,是不行的。这
令我到底惦着江南了。--这样想着,猛一抬头,不觉已是自己的门前;轻轻地推门进去,
什么声息也没有,妻已睡熟好久了。

내가 아버지를 뵙지 못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아버지 마저 실직되어 정말이지 불행이 겹쳐서 온 날들이었다. 내가 북경에서 서주에 온 것은 아버지를 도와 서둘러 장례를 치를 생각에서였다. 서주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뵈며 마당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니 할머니 생각에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는 애써 태연한 듯이 말씀하셨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느냐.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느냐?" 집에 돌아와서 급한 대로 저당을 잡혀 돈을 변통하고 아버지는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돈을 빌려 장례를 치렀으니 당시의 집안 형편은 매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빌린 돈의 반은 장례를 치렀고, 또 반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그럭저럭 써 버렸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는 남경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셔야 했고, 나도 북경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동행하게 되었다.

남경에 도착해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거기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포구로 가서 강을 건너 오후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야 했다. 아버지는 바쁘셔서 나를 전송하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대신 아버지는 여관의 잘 아는 심부름꾼에게 같이 가도록 부탁을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심부름꾼에게 자질구레한 하나 하나까지 자상하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자못 한참 동안 망설이시는 것이었다. 그 해 나는 이미 스무 살이 넘었으며 북경도 벌써 두 세 차례 왕래한 적이 있었으므로, 사실 아버지가 걱정할 것은 못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머뭇거리시던 아버지는 끝내 당신이 나를 전송하기로 결정하셨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몇 번을 만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괜찮아, 남에게 너는 맡기는 것은 좋지 않아!" 우리는 강을 건너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나는 표를 샀고 아버지는 짐을 살피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짐이 너무 많아서 돈을 주어 짐꾼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도 아버지는 그들과 짐 값을 깎느라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귀에 거슬리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어코 짐 값을 깎으시고는 나를 태워 주셨다. 아버지는 차창 가로 내 자리를 잡아 주셨고,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만들어 준 자줏빛 털외투를 자리에 깔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길 조심할 것을 말씀하셨고, 밤에는 때로 정신을 차려 감기에 들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심부름꾼에게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계신다고 아버지를 비웃었다. 돈만 받으면 그뿐인 그들에게 부탁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이만한 나이에 내 일 하나 처신 못할까봐서....? 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내가 지나칠 정도도 너무 총명하였다. "아버지 그만 돌아가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창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내 가서 귤을 몇 개 사 가지고 올 테니 너는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나는 저쪽 플랫폼의 울타리 밖에 몇몇 상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으로 가자면 반드시 철로를 건너야 했고, 그러려면 반드시 철로를 건너 저쪽 플랫폼으로 기어올라가서는 다시 내려와야만 했다. 아버지는 몸이 뚱뚱하셔서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까만 천의 작은 모자를 쓰고, 검고 큰 마고자와 검푸른 색의 솜저고리를 입고 뒤뚱거리며 철길을 건너가셨다. 거기까지는 그런 대로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저쪽 플랫폼을 오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손으로 위쪽을 잡고 힘들 다해 두 다리를 끌어당기시는 아버지는 그런 상태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이 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남들이 볼까 봐, 그리고 아버지가 볼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시 창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아버지는 주홍빛 귤을 안고 걸어오고 계셨다. 아버지는 다시 철길로 내려와야 했으므로 귤을 다시 땅에 내려놓으시고 천천히 내려서는 다시 귤을 끌어안고 오셨다. 내 곁으로 오셨을 때 나는 얼른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와 나는 다시 기차 안으로 들어와 사 가지고 온 귤을 외투에다 쏟아 부었다. 그때서야 아버지는 할 일을 다 해서 홀가분하다는 듯이 옷을 털고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 이제 간다. 가서 편지하렴." 아버지는 다시 몇 걸음 옮기시더니 그래도 안심이 안되시는지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들어가거라, 안에 아무도 없쟎니!" 아버지의 뒷모습이 사람들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는 들어와 앉았고 또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또 나대로 너무나 바빴고, 그런 와중에 집안 형편은 나날이 기울어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밖으로 나가 일을 하며 자립하신 아버지인데, 늙어서까지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침울함 속에서 나날을 보내셨다. 그러니 이따금 그 울분을 토해 내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나를 대하는 것도 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근 2년 동안을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그런 당신의 아들을 보고 싶어하셨다. 북경으로 돌아오고 나서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제 늙었나 보다. 어깨가 무겁고 너무 아파서 젓가락을 들기도, 연필을 쥐기도 힘겹구나. 이제 죽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까만 천의 큰 마고자와 검푸른 색의 솜저고리를 입고 뒤뚱거리며 철길을 건너시던 그때의 아버지 뒷모습이 눈물 속에서 또 다시 떠오른 때문이었다. 아! 이제 언제쯤 아버님을 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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